2016년 6월 29일 수요일

다수결과 죄수의 딜레마

최근 아는 분과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야당에 가보니까 희망이 보이던가요?"
부드럽고 겸손한 그의 평소 말씨와는 달리 약간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는 내가 정치권에 간 것을 좋게 보지 않는 분이다. 내가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엉뚱한 데 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지식인층에 자주 보이는 정치 혐오파다. 여당도 안 좋아하지만 더민주당도 마뜩치 않아 하는 편이다. 차라리 국민의 당에 심정적으로 기우는 편이다.
살짝 비껴서 받아 넘겼다. 
"선생님, 만약 제1야당인 더민주당에도 희망이 안 보이면 우리 나라는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이죠." 
그는 웃고 말았다.
"그건 그렇네."
며칠 전 나는 영국의 국민투표와 호남의 총선투표 사이에 약간 유사성이 있다고 했다. 그 유사성은 죄수의 딜레마 상황처럼 자기가 투표할 때 자기의 의사에 의해서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투표할지를 예측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가만히 더 생각해보면 그 유사성 뒤에는 게임 이론적인 고려 외에 다른 요소가 숨어 있다. 그것은 다수결 제도다. 
다수결(majority rule)은 양자 대립 결정(binary decision) 방식이다.
다수결 제도(Majority Rule)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결과가 매우 확실(decisive)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대안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외통수다. 다른 수가 없다.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찬성 하는 사람이 한명만 더 많아도 논의가 종결된다.
가장 큰 단점은 장점과 마찬가지로 결정 결과가 단호하다는 데 있다.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없다. 그래서 같이 협조해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성격이 강한 곳에서 의사 결정을 너무 자주 다수결로 해버리면 그 공동체는 오래 지탱될 수가 없다.
영국이나 호남에서 발생한 현상의 특징은 이렇게 다수결이 양자 대립 의사 결정 방식이므로 투표 시 그 대립된 양자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만 했어야 하는데 일부 사람들이 하나의 투표를 통해 하나가 아니라 두가지 의사 표시를 하고자 행동을 한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투표제도가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하는 단순 다수결이거나 소선거구제에서 득표를 가장 많이 한 사람만이 선출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52대 48이었다. 만약 영국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 표시로 탈퇴를 원하지도 않으면서 탈퇴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 3%만 넘었어도 이런 심정에 의해 탈퇴가 결정된 셈이다.
호남 지역에서는 두 야당이 받은 지역구 표는 47대 37이었다. 만약 호남에서 국민의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더민주당에게 경고를 던지고 싶어서 국민의당을 뽑은 사람이 6%를 넘었고, 그들이 더민주에 표를 주었으면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지역구 의석을 휩쓸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심정 때문에 투표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영국의 국민투표나 호남의 총선이 이런 심정 때문만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영국의 52%와 호남의 47%가 그런 생각만으로 투표 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단지, 내 얘기는 양 선거 모두, 결과를 미리 알았다면 분명 다르게 투표했을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죄수의 딜레마를 느끼면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민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여당이 야당 분열 덕분에 어부지리로 득세하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 할 수 없이 더민주를 뽑은 사람들도 수도권 지역에서 꽤 많았을 것이니 말이다. 소선거구제와 양당제 아래에서는 다른 수가 별로 없다.
나부터가 그러했다. 이건 마치 죄수 같았다. 억지로 뽑아주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더민주당을 뽑지 않은 호남 사람들의 심정을 일부 공감한다. 
그래서 정치권에 갔다. 물론 더민주당이 좋아서 간 것은 아니다. 제1야당에 희망이 없으면 우리 나라에 정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갔다. 정치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그 당을 좋게 만들지 않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내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이것도 안 하면서 투덜대기만 하면 후대에 미안할 것 같아서 갔다. 매 선거 때마다 죄수의 딜레마를 느끼면서 마음에 안 드는 정당에 표를 주는 것이 지겹기도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야당에 희망을 느끼게 되어 이런 딜레마를 느끼지 않게 됐으면 좋겠다. 
또는, 자기가 희망을 느끼는 당에 투표할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내각 책임제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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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역구 대표와 비례 대표를 섞은 내각책임제가 좋겠다는 뜻이다.)

2016년 6월 26일 일요일

게임이론으로 본 투표

영국의 EU 탈퇴 투표와 지난 총선에서의 호남 지역민의 투표 행위에서 일종의 유사성을 느끼는 것이 나 뿐인가 싶다.
영국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투표해놓고 막상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자기들도 놀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하루만에 통화가치가 8%나 하락하고, 주식 시장이 폭락했다는 것만 봐도 금융시장은 이것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영국 언론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탈퇴할 것을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불평을 표출하는 기회로 삼아 탈퇴안에 찬성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심리에 의해 탈퇴에 찬성한 것은 일종의 무임승차 심리다. 어차피 자기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유럽연합에 잔류하는 쪽으로 투표할 것인데 굳이 자기 마저 잔류에 투표할 것 있나, 그럴 바에야 잔류를 예상하고 국민투표에 붙힌 캐머론이나 또는 사회 여론 주도층에 대한 반발심을 표현하기 위해 탈퇴에 찬성하고 보자. 
탈퇴를 주장했던 전 런던시장 보리스 존슨도 다음 날 기자회견에 나와서 환호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도 충격을 받아 얼떨떨해 하는 눈치를 보였다는 것도 일종의 희극이다. 
지난 총선에서 호남이 더민주당을 버리고 국민의당 후보를 대거 선출한 것도 비슷한 심리가 작용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저 더민주에 흠집을 내기만 원했던 안철수씨가 자기당으로서는 예상외의 선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민주가 제 1당이 된 선거 결과에 대해 복잡한 내심을 보였던 것도 보리스 존슨의 반응과 일맥상통한다.
호남 사람들은 더민주당에 대해 불만인데도 더민주당이 호남에서 당연한 듯이 의석을 챙겨가는 것이 얄미웠다. 제 3당이 나오니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더민주에 투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자기는 더민주 너희들 한번 물 먹어봐라 하는 심정에서 제3당에 투표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선거 결과를 보고 "아니,이렇게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싶었던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무임승차라고 했지만 사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게임 이론상 비협조적 게임(non-cooperative game)에서 벌어진 상황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비협조적 게임은 서로가 미리 정해진 계약이나 약속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게임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협조적 게임의 예로 들어봤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다. 이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두 명의 공범이 상대방이 서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게임에서 자기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다룬다. 동료가 자백을 할 지 모르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수도권에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투표할 지를 모르기 때문에 야당 붕괴를 우려해서 실제 지지층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민주에 표를 주었다.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다.
그런데 만약 동료가 무엇을 할지 안다고 자기가 생각한다면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호남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투표할 지를 안다고 생각했다. 야당 붕괴를 그만큼 덜 걱정했다. 그래서 제1야당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일탈이 가능했다. 동료가 자백할 것을 알고 있는 죄수와 비슷했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해서 행동한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유럽 잔류에 투표할테니 나라도 한번 세상에 대한 내 불만을 표출해보자는 심리나, 다른 사람들이 제1야당을 뽑을테니 나라도 한번 내 불만을 표출해보자는 심리나 모두 마찬가지다. 하나의 투표로 두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보내려다가 일이 이상하게 되었다. 
이제 그 결과를 보았다. 같은 기회가 다시 한번 더 주어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영국의 경우, 만약 다시 국민투표를 한다면 탈퇴안이 통과 될 것 같지 않다.
한국의 경우, 내년 대통령 선거 때 국민들은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그때도 수도권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작용할까? 호남은 여전히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 안다고 생각하고 투표할까?

2016년 6월 7일 화요일

저출산 대책에 옮겨붙은 원하청 질병

제목을 보고 무슨 소리인가 싶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원청-하청을 한국 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병이란 뜻에서 학질처럼 “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다. ‘원하청 질병'
이 병은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전근대적 의식에 잠재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교합하는 모든 사회 부문에 퍼져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기업과 하청기업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 원청-하청 시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유용할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시각에서 조명되지 않는 문제도 알고 보면 원하청 질병에 걸려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제이콥 루 미국 재무장관이 한국 경제의 최대 약점으로 '저출산' 문제를 꼽았다는 조선일보 기사가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루 장관은 지난 3일 열린 한·미 재무장관 회담에서 "과거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도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들어 경제 활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핵심 과제가 인구 문제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단기적으로는 성장률 침체와 소득 양극화라면 장기적으로는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에도 한국 내외에 많았다. 이제는 미국 재무장관도 이를 알고 한국 경제 부총리에게 물을 지경이 되었다. "너 이거는 알고 있냐, 안다면 뭐하고 있는 거냐?"는 우호적인 우려 또는 질책으로도 들린다. 
기사에 의하면 유일호 부총리는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안 그래도 출산율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다양한 출산 장려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답했다.
짦은 기사이므로 이것이 유부총리의 답변을 충분히 반영하지는 못했을 수 있지만 나로서는 이런 그의 응답이 흥미롭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우선, 나라면 출산 장려 대책이라는 시각에서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출산은 매우 복합적인 사회현상이다. 이런 문제는 대증치료에 가까운 '출산 장려 대책' 같은 것을 들이댄다고 해서 개선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정부가 출산 장려 정책을 '마련 중'이라고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정부가 출산 장려 정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시도한 것이 2005년 전후였다. 벌써 거의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마련 중'이라니 약간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아마 말 그대로 추가적인 정책안을 마련하고 있거나, 유일호씨도 그 동안의 정부정책이 미흡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사실 지금까지 정부가 시행한 정책은 그야말로 언발에 오줌누기식이 아니면 방향이 잘못 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요즈음 결혼을 못하거나 안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하나만 낳는 부부가 늘고 있다. 10년 전부터 서른을 넘긴 여성의 결혼식이 흔하게 되더니 요새는 어느덧 서른이 안된 여성의 결혼식이 도리어 드물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2014년 서울 시민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2.8세, 여성 30.7세였다. 평균 초혼 연령을 남성과 여성 모두 서른을 넘긴 것이다. 이 숫자가 얼마나 빨리 상승했는지는 과거 통계와 비교해 보면 안다. 20년 전(1994년)에는 각각 28.6세, 25.8세였다. 10년 전인 2004년에는 남성 30.9세, 여성 28.3세였다. 
그래서 30대 남녀의 결혼률이 서울의 경우 남자는 60%, 여자는 70% 밖에 안된다. 
이렇게 늦게 결혼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내 어머니는 1956년 만 24세에 결혼해서 넷을 낳으셨는데 막내 동생을 낳았을 때가 서른 한살이었다. 60년 전에는 막내를 낳을 시기에 요즈음은 처음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마당에 아이를 셋 가졌을 때 이런 저런 혜택을 주겠다고 하니 언발에 오줌누기란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선 젊은 세대들이 결혼을 너무 늦추지 않을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적인 얘기다.
그럼 왜 한국 사람들은 결혼을 늦게 할까?
일반 여론이나 보수적인 인사들은 결혼율이나 출산률이 낮아진 이유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은 것을 드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피상적인 얘기다.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누가 억제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저출산의 이유로 든다면 무책스러운 얘기를 하는 것이 된다.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더라도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헛소리를 제외하고 보면 한국의 결혼율이 낮은 이유로는 취업율이 낮은 것과 양육비와 교육비가 높은 것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15세~29세 취업율이 40%를 맴돌고 있다. 이는 OECD 평균 50%에 비해 약 10%정도가 떨어진다. 청년실업이 문제라는 유럽의 경우도 이 숫자가 60%에 달하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이 통계는 매우 돋보인다.
그런데, 낮은 취업률과 높은 양육비용 및 교육비용은 경제 구조상 하루 아침에 바꾸기가 어렵다.
아주 작은 싸이클 하나만 얘기해보자. 너무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대학교에 진학한다. 교육부와 교수들이 경직적인 학교를 운영해서 취업이 어려운 전공 과목 정원을 줄이기 어렵다.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전공을 택해야 한다. 이분화된 노동시장에서는 취업 초기부터 원청 부문에 들어가지 않으면 두번째 기회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취업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대기업은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다. 높은 임금을 주어 많이 고용하느니 하청업자에게 일을 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렇게 해서는 국민의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질 수가 없다. 내수가 죽는다. 원청에 껴들어간 사람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낫다.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대학에 가야 한다. 
자, 이렇게 요 싸이클 하나만 해도 어떻게 바꿀지 막막하다. 
그런데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돈이 들어가는 주택 비용이다. 소득 대비 너무 높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싸이클이 뒤에 숨어 있다. 
이렇게 문제를 각자 하나씩 따로 보더라도 각각이 쉽게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 고려하려면 아예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런 전체 경제 구조상의 제약 조건을 차치하더라도 정부가 그나마 이미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실시하고 있는 정책도 그 방향이나 실효성이 의심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가장 좋은 예가 누리과정이다. 2012년부터 무상보육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누리과정을 통해 현재 학부모들이 지원받는 금액은 유치원(유아 학비+방과후 과정비)은 공립 11만 원, 사립 29만 원, 어린이집은 보육료 22만 원과 방과후 과정비 7만 원 등 인당 총 22만~29만 원이다.
지금은 누리과정에 대한 예산 배정을 갖고 중앙정부와 지방 교육청 사이에서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내 생각에 한국의 보육정책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이러한 국가보조금을 정부가 부모에게 직접 지급하지 않고 보육기관에 지급한다는 것이다. 보육기관들이 공립이 아니라 대부분 사립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다.
지금은 주로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경우 국가가 재정 보조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상하기 짝이 없게 설계된 정책이다. 
누가 되었든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 돈이 들어간다. 보육기관에 보내든 말든 그러하다. 그렇다면 보육 보조금은 아이를 기르고 있는 가족에게 직접 지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 돈을 집에서 아이를 기르기로 한 엄마가 일상 생활비에 쓰든 아니면 가까운 일가붙이에게 아이를 맡기든 정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주 어린 영유아는 어린이집 같은 시설보다는 엄마나 가족이 직접 돌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너무 어리면 아이도 힘들고 어린이 집에서 돌보기도 어렵다. 내 경험으로도 미국에서 아이를 기를 때만 두살이 되지 않은 아이는 유아원에서 받지를 않았다. 2살이 넘은 아이도 되도록이면 종일반이 아니라 세시간만 맡기는 반일반을 유치원에서 권했다.
지난 총선에서 나는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가정에게 직접 지급하는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지만 모두들 회피했다. 지역구에서 어린이집과 유치원 원장들이 반발한다는 것이었었다. 직접 지급 방식으로 바꾸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표는 불확실한데 어린이 집과 유치원장의 반발로 잃을 수 있는 표는 확실하다는 계산이었다.
가정의 보육비를 지원하고 싶다면 이런 방식에 비해 정부가 부모에게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효율적이다. 굳이 소득에 따라 차등하고 싶으면 할 수도 있다. 우리보다 보육 지원을 먼저 도입한 다른 나라들 대부분이 이렇게 직접 지급 방식을 선호한다. 한국처럼 사립 유치원에게 까지 국가가 보조금을 주는 방식은 아주 희귀한 사례다. 
그런데 이렇게 재정 보조를 국가가 수혜자에게 직접 지급하지 않고 중간에 있는 서비스 제공업체에게 지불하는 방식은 한국정부의 다른 부문에서도 나타나는 방식이다. 청년 고용지원을 하기 위해 정부가 50가지가 넘는 정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연간 2조원이 넘는 돈이 들지만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 효과는 미미하다. 농업 역시 사업 예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민에게 직접 돈이 지급되는 액수는 전체 농정 예산의 10%대에 불과하다. 
재원을 배분하는 중앙부처 관료는 자원배분 권한 때문에 권력이 늘고 자리가 더 필요해진다. 이를 받아서 배분하는 지방 교육청의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결국 무상보육이라는 아름다운 취지로 시작한 제도도 이렇게 원청업자의 권력을 늘려주는데 악용되었다. 
이런 체제는 일단 고착화되면 없애기가 어렵다. 이를 통해 생사가 정해지는 소수의 기득권 층이 생기는 반면 이를 개혁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층은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한국 사회의 원청과 하청이란 병은 이렇게 좋은 취지로 시작한 무상보육정책도 감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