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4일 일요일

지식 노동자와 직장 민주화


아침 커피를 같이 마시며 아내가 한 말을 듣고 생각난 김에 쓴 어제 글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느낄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는 뜻일 게다. 그만큼 이 문제는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고 깊게 퍼져 있다. 
몇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밥 버클리(Robert Buckley)는 내가 세계은행 리서치 본부에서 처음 일할 때 친하게 지낸 미국인 선배다. 나보다 약 15살 정도 많았으니 그 당시 막 50대에 들었을 나이였다. 그가 한 말 중 인상 깊었던 말이 있다. 
20대는 이론을 배울 때다.
30대는 현장 실습을 통해 이론 적용을 배울 때다.
40대는 그 이론과 실습 경험을 결합해 본격적으로 일을 할 때다.
50대는 이런 경험을 살려 조직과 후배들을 길러 줄 때다.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인생 단계를 10 년 별로 나눈 얘기다. 처음 들었을 때도 상당히 그럴듯 하게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의 지혜를 새삼 더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직장 후배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곤 한다. 
또 다른 일화. 한국에 돌아와 삼성전자에서 시작해서 여러 회사를 거치면서 내가 했던 일은 하나 같이 그 프로젝트를 맡기 전까지 내가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도 안 해본 낯선 프로젝트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거의 마흔을 바라보면서 귀국할 때까지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경제학과 경제정책만을 생각해보았을 뿐 민간 기업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오래 밖에서 살아서 한국 경제와 기업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바가 없었다. 그냥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딪치는 수 밖에 없었다. 매번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느낌이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에 재미가 들기도 했다.
얘기가 샜는데,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게 아니라, 그렇게 계속 되던 프로젝트 중 삼성생명에서 일 할 때 맡은 어느 프로젝트가 끝나고 난 후 내 상사가 나에게 한 말이다. 사장과 다른 고위 임원들이 모두 모인 전사 임원회의에서 차장인 내가 직접 보고를 했다. 그 발표가 끝나고 나서 그는 나에게 프로젝트가 잘되었다는 등의 칭찬 대신 의외의 코멘트를 남겼다. 
나이 마흔에 이런 새롭고 복잡한 사안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한 장문의 분석 보고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자기라면 도저히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몰랐다. 그는 삼성 그룹에서도 유난히 똑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내가 아직 한국 기업 풍습에 익숙하지 않을 때 였다. 
나중에 점차 한국 기업의 업무 관행을 알게 되면서 그 맥락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국 기업에서는 조금만 직급이 올라가도 보고서를 직접 쓰지 않았다. 윗사람은 아래 직원이 쓴 보고서나 결재안을 수정하거나 가필하기만 했다. 사장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라도 알고보면 대리가 쓴 보고서를 과장이 한 번 고치라고 하고, 차장이 또 한번 고치라고 하고, 부장이 또 한번 고치라고 하고, 임원이 또 한번 고치라고 해서 만들었다. 
1999년인가 러시아가 디폴트 선언을 하자 그 다음 날 아침 각기 다른 다섯 부서에서 만든 보고서가 사장에게 올라갔다. 다섯 부서! 디폴트 발표 후 첫날이어서 모두 외신이나 이를 베낀 국내 신문을 참조하는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는데도 그랬다. 내가 보기엔 그냥 사장이 외국 신문이나 국내 신문을 직접 읽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읽어봤자 한국에서 딱히 취할 조치도 별로 없었다. 물론 그 다섯개의 보고서는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대리들이 썼을 것이다. 상사들은 집에 안 가고 초안을 기다렸다가 문구 수정을 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드는 과정을 본 두 보고서는 그랬다. 그럴바에야 자기들이 직접 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요새 들어 조금은 나아졌지만 큰 그림에서는 비슷하다. 조직에서 중간 간부만 되어도 초안을 자기가 쓰는 법이 없다. 그런데 모든 글은 처음 틀을 잡는게 제일 어렵다. 제일 두뇌에 고통을 주는 일을 대리가 맡은 셈이다. 우리 회사도 대리, 과장이 쓴 어설픈 보고서를 내게 디밀고 딴청 부리는 부장들이 수두룩하다. 자기가 직접 쓴 글을 갖고 오는 경우는 아주 희귀하다. 
돌이켜보면 삼성생명의 내 상사 임원은 나이가 마흔이 된 내가 직접 아무도 만들어 보지 못한 회사 내부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고 문헌 조사를 해서 다각도로 검토한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직접 썼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직장인은 직급이 조금만 올라가면 몇 페이지 안되는 글도 자기가 처음부터 쓰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사장이나 임원이 직접 장문의 글을 직접 쓸 때가 많다. 이번에 힐러리 클린튼의 국무장과 재직 시절 사설 이메일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 역시 이메일을 직접 작성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또 다른 일화. 몇년 후 외국계 컨설팅 업체로 옮겼더니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MBA를 거쳐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면 어소이엇트(associate)라고 부른다. 몇 년 일하면 매니저가 된다. 그 다음은 프린시펄(principal)이고, 그 다음이 파트너다. 컨설팅 회사는 보고서를 일반 보고서 처럼 쓰지 않고 발표용 슬라이드로 만들어 쓴다. 외국에서는 머리가 허연 50대 파트너들이 직접 슬라이드를 만드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수정하기 좋도록 연필을 들고 직접 그리는 것을 외국 사무소에서 여러번 보았다. 그런데 한국은 매니저만 되어도 슬라이드를 직접 만들지 않는다. 외국 파트너급들보다 나이가 새파랗게 어린 서울 사무소의 파트너들과 프린시팔들은 프로젝트 따내는 고객 관계만 관리한다. 
또 다른 일화. 아내는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어느 대학교에 취직했다. 그들은 전임강사도 아니고 전임교원이라는 직급을 주었다. 명색이 영어학과인데 교수들은 대부분 국내 대학에서 학위를 했다. 그나마 아내를 추천해 준 선배는 국내에서 학위를 하면서 강사로 돌다가 자기 아내가 외국 회사에서 명퇴하며 받은 돈을 상납하고 들어갔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냥 버티기로 했다. 
아내는 재직 도중 선배 교수들의 논문을 수도 없이 대신 써주었다고 한다. 학술진흥재단에 응모하려고 해도 정교수를 꼭 끼워야 응모할 수 있었다. 온갖 학사 업무를 맡아서 일하며 몇년 동안 기다렸지만 어설픈 국내 대학에서 학위를 한 다른 시간 강사가 전임 강사로 선정되는 것을 보고 그는 상심했다. 두 아이를 유치원과 보모에게 맡기면서 시간에 쫓겨서 정신 없이 지내면서도 열심히 논문을 쓰는 그를 옆에서 보고 있었던 나는 남편으로서 미안하고 참담했다. 그가 그 당시 자기 논문만이 아니라 남의 논문도 써주고 있는 줄을 알게 된 것도 몇주 전에 그가 불쑥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더욱 미안했다. 
그는 외국 대학으로 옮겼다가 몇년 후 다시 귀국하면서 국내 대학 전직을 단념했다. 나는 한국 사회가 아내 같은 사람을 학자로 쓰지 않는 것은 큰 손실이라고 믿는다. 그가 학자 커리어를 접은 것은 대부분 나와 가족 탓이지만 그냥 정상적인 사회만 되었어도 그는 지금 훌륭한 교수로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일화. 2004년 우리금융에 가서 우리은행 사람들과 일을 했다. 은행 부장이면 대개 오십대 초반으로 일반 회사 임원급이다. 업무 논의를 위해 이들을 오라고 하면 부르지도 않은 차장급 직원을 꼭 대동하고 왔다. 업무를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고 딴 곳을 쳐다본다. 자꾸 물으면 드디어 대동한 직원이 대답하기 시작한다. 묻기는 부장에게 물었는데 왜 당신이 대신 대답하느냐고 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은행은 과장에서 차장으로만 승진해도 업무를 직접 하지 않는다. 부장이면 자기 담당 업무의 내용을 잘 모른다. 창구에서도 옛날에는 뒤에서 신문 보다가 결제 사인 하던 과차장들이 요즘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웹서핑하다가 결재가 뜨면 마우스 클릭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 이게 한국이다. 
한국의 인적 자원이 빠르게 퇴화(obsolescent)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동시에 작용한다. 
첫째 고속성장기에는 필요한 기술과 지식이 빨리 변한다. 7~80년대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은 원래도 부실했으니 직장에 나온 후 빠르게 쓸모가 없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둘째, 그런데 직장인 재교육 과정은 부실하다. 하급 직원용 교육은 있지만 고급 지식 노동자로서 필요한 지식이나 리더쉽 교육은 아직도 부실하다. 지식 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능력, 개념을 갖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인데 그런 교육은 지금도 안 시켜준다. 최신 흐름을 익힐 해외 컨퍼런스도 젊은 사람만 간다. 가 봤자 못 알아듣는다.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밤에 시간 나면 회사 돈으로 술 마시고, 주말에는 퍼져 자거나 누군가의 공돈으로 골프를 친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중간 간부만 되어도 직접 업무를 하지 않고 아래 사람에게 미룬다. 데이터도 직접 다루지 않고 글도 직접 쓰지 않는다. 지식의 심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현장에서 멀어지니 원숙하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은 기대하기 어렵다.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뛰지 않고 부하로부터 보고만 받으니 아래 사람만 더 볶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은 순식간에 퇴화된다. 직접 고민을 하고 자기가 지식을 새롭게 만드는 수고를 잠시만 하지 않으면 처음 십년은 버틸지 몰라도 그 후에는 완전히 퇴화된다. 
모든 분야가 그렇다. 최고의 지식산업인 학계가 제일 심하다. 공무원도 그렇다. 회사도 그렇다. 언론도 그렇다. 기자 회견을 보면 외국 기자들은 4~50대 기자들도 많은데 한국은 새파란 젊은 기자 투성이다. 마흔만 넘으면 사실 확인도 안하고 대가가 된 양 컬럼을 쓴다. 
나이가 든 사람의 지적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생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나이 든 층이 너무 많은 권력과 보상을 누리고 있다. 그것도 그 방식이 너무 착취적이다. 위계질서를 지나치게 남용한다. 군대 내무반 문화가 사회 전체를 휘어 잡고 있다. 
그 좋은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동일 직장내 청년층 대비 장년층의 사람들의 임금 비율이다. 초년생 대비 50대의 임금 배수가 너무 높다. 한국 사회에서 더 큰 문제는 내부자와 외부자 간 이중화이기는 하다. 공기업과 대기업 연봉과 중소기업 연봉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러나 그 이중구조는 대졸 초임에서만 있는게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장자들 사이의 이중화는 더 심할 것이다. 대한상의가 한일간 대기업 연장자 임금비교를 했으면 좋겠다. 
연장자 임금이 너무 높은 예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사, 교수 임금 구조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교사와 교수들의 연봉이 너무 높다. 그 중에서도 선임 교사, 교수들의 임금이 초임 교사, 교수들에 비해 너무 높다. 게다가 정교수들은 시간강사를 착취하고 정부와 기업 프로젝트를 받아 대학원생을 하인처럼 부리면서 연구비를 빼어 쓴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언론에 등장해 나라를 걱정하고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단다. 자기 코 앞의 부정의에는 눈을 돌린다. 
이 모든 것은 한국 경제의 생산성을 갉아먹고 있다. 엄청난 낭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선진경제가 될 수 없다. 
내 말은 50대가 조기은퇴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 친구 밥 버클리가 말 한 것처럼 후배들 생각 좀 하라는 말이다. 50대의 사회적 역할은 후배를 길러주는 것이다. 회사 임원이든 정교수이든 그것을 해야 한다. 생산성이 떨어지면 조금 덜 누리고 후배 양성이라도 좀 더 하라는 말이다. 고속성장기에는 우리도 젊을 때 그랬다, 이렇게 고생하면 너희도 우리처럼 나중에 등 따시고 좋아진다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렇지 않은가? 지금 50대 세대는 곧 은퇴하겠지만 젊은 직원들은 앞으로 20년, 30년을 더 다녀야 한다. 그 미래를 준비하도록 키워주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정치권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진정한 개선은 사회 전반의 분권화, 투명화를 통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개별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더 많은 민주화, 직장에서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지금 50대가 이것을 인식하고 직장에서의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직장 민주화에 좀더 의식적인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어제 글에 이상준 씨가 올린 댓글을 옮기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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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세대가 자리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누린 것 보다 더 좋고 많은 기회를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자각 하지 못 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세대가 누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지식 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대의 철학과 역량과 봉사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세대가 다 물러가고 세계 일류 대학을 나온 30대가 그 자리에 앉는 다고 미래를 위한 기회가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의무와 책임감을 갖고 후대를 위하여 새로운 기회와 장을 만들어야 하고, 사회 시스템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후대를 위한 기회를 만들고 젊은 사람들은 그 기회와 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으며 선배들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확대 재 생산이 되고 순기능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명감과 시스템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장속도 둔화가 가져온 새로운 세대 교체 문제

아내 친구 중에는 대학 교수가 많다. 아내 말로는 하나 같이 양심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어제 모임에서 자기 친구가 말한 것을 그가 전해주었다. 
시내 모 대학 인문학과 교수인 아내 친구에 의하면 자기 학교에서 사람을 뽑는 중이라고 한다. 조교수가 아니라 부설 연구소 연구원을 뽑고 있다. 최종 후보자가 세 명으로 좁혀져 동료 교수들과 인터뷰를 했다. 
우연히도 세 명 모두 외고를 나와 직접 유학을 갔거나 국내 대학을 1~2년 다니다가 미국 대학에 일찌감치 전학 갔던 사람이라고 한다. 각각 하바드 박사, 예일 박사, 시카고 박사였다. 그것도 꾸역꾸역 겨우 박사 학위 하나 받아낸 자기들과 달리 이미 학자로서 발표한 우수한 논문들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너무 훌륭한 사람들인데 그 중의 하나만 뽑아야 하고, 그것도 교수도 아닌 자리를 준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인터뷰를 같이 하고 있는 동료 교수들을 둘러봤다고. 갑자기 자기 동료들이 미워지고 자기 자신이 창피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엔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는 50대 교수들이 (자기 포함) 응모한 30대 중반인 젊은 학자들에 비하면 학자로서의 실력이 떨어진단다. 그런 주제에 자기들은 교수랍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들을 뽑는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고 한다. 자기들은 고성장 시기에 대학교 자리가 빠르게 늘면서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았는데 지금 세대는 좋은 실력을 갖고도 취직이 안되니 말이다.
그 모임에 같이 있던 다른 교수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였단다. 
자기들은 나이가 50이 넘으면서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져서 공부를 해도 진척이 없다고 한단다. 그래도 그나마 남에게 쓸모가 있으려고 학생 수업에 더 신경을 쓰고, 동아리 담당이나 보직 교수일도 더 열심히 한단다. 그렇지만 자기들보다 훨씬 잘 배운 젊은 신진학자들이 자리를 못잡고 있는데 자기들은 한국이 낙후되었던 시기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앞으로도 10년을 더 교수직에 있을 것이 못내 미안하다고 했단다. 차라리 조기 은퇴라도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라는 얘기도 나왔단다. 
아내는 그런 얘기를 전하면서 그래도 자기 친구들이 그런 양심이라도 있는 것이 대견했다고 했다.
메리토크라시라는 측면에서 한국은 이와 같이 새로운 문제를 안고 있다. 고속성장을 하면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했다. 지금 높은 자리에 있거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 때 큰 사람들이다. 아무리 한국이 엘리트 선발과 육성에서 비합리적이라고는 해도 전체적으로는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평균적으로는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할 때 얘기다. 세대간 비교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후배들 능력이 더 뛰어나다. 어릴 때부터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학문을 배웠고, 사회 경험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좋은 훈련을 더 일찍 받았다. 
나는 한국에 90년대 중반에 돌아온 후 몇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10년 위인 상사들 보다 내 또래 직장인들이 확실히 더 우수했고, 나보다 10년 아래인 후배들이 우리 세대들 보다 더 우수했다. 더 많이 알고, 더 개방적이고, 더 유연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들이 지도층이 된다. 또 그들 아래 세대는 그들보다 더 낫다.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사회가 저절로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제는 이런 시나리오처럼 흘러가지 않고 있다. 나이 많은 세대의 은퇴 연령이 길어지고 있다. 저성장이 예상보다 빨리 닥치면서 젊은 세대가 취직할 좋은 직장 수가 줄어들고 있다. 직장을 다녀야 현장 경험을 통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데 아예 직장에 못 들어가니 장기적으로는 동세대 인구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경제학적으로 이것을 빈티지 캐피탈이라는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즉 각 자본재는 태어난 시대의 기술을 체화한 것이라서 언제 생산된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포도주 처럼 각 자본재에 생산연도를 붙여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량의 단순 합이 아니라 제조 연도 별 구성과 노후화 속도를 따져봐야 한다. 
인적 자본도 그렇다. 언제 키운 인재인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교육 기술 수준이 낮은 시절에 길러 낸 인력이 너무 오래 직장을 다니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그동안 고속 성장을 해서 그 인력들이 자랄 때보다 지금 세상이 크게 달라져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시대에 뒤떨어져서 쓸모가 없게 된 자본재는 도태시켜야 한다. 고철 처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복잡해진다.
유일한 대처 방안은 재교육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그 인력들을 계속 재훈련시켜서 시대에 맞는 인력으로 다시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작업에 소홀했다. 한국 회사의 직원 훈련 프로그램은 너무 허술하다. 끽해야 과장급까지만 그런대로 육성 프로그램이 있고 그 이상이 되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더쉽 교육은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고속성장 시기가 저속성장 시기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생각하지도 않은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권력 문제다. 능력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후배들은 지휘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리를 안 비켜주고 있기도 하지만 옛날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 정부의 지도층이다. 뼈속 깊이 시대착오적이다. 30년 전 얘기를 다시 꺼내들고 있다. 그 때 자랐으니 그렇다고 하기엔 동년배들 사이 중에서도 유독 더 뒤떨어진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젊은 층이 질색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당 정치인들도 그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젠 자기만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후배들을 발탁하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새로운 세대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기업 지도층도 마찬가지다. 점점 노령화하고 있다. 사람 키우는데 인색하다. 예전보다 희망퇴직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낮아지고 자기 미래도 불확실해지니까 직원을 단기 실적 올리는데만 이용한다는 느낌을 주는 경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가 여러 직장을 거치면서 느낀 것인데 지나놓고 나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사람이다. 남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 키워서 나중에서 그들이 성공해 있는 것을 보는 것만큼 의미 있고 보람 있는 것이 없다. 내가 있으면서 무엇을 했는가는 지나가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인재 육성이 더 오래간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거치적 거리는 사람들도 과감히 치워야 한다. 
한국이 원래 갖고 있던 가버넌스의 비합리성이 급격히 들이 닥친 저성장 국면과 맞물리면서 한국 사회에 전혀 새로운 도전 과제를 던지고 있다. 내 또래 사람들이 더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한국 메리토크라시의 위기 (II)

어제 산업은행 총재 인선에 관한 기사를 보고 생각난 김에 한국 사회의 가버넌스에 관해 평시 갖고 있던 생각을 썼다. 반응이 예상 외로 뜨겁다. 지금까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빠르게 응답을 했다. 그들도 평시에 느끼던 문제였던 것 같다. 
댓글에서 Hyungjin Hong씨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분야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분야 별로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아예 각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이와 관련해서 어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댓글을 달아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 그렇게 하면 이게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 (꼭 그러라는 얘기는 아니다.) 
얼마나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최상부 부터 그 아래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문제인지 한번 챙겨보자.
우선 대통령, 대법관, 국회의장, 국회의원 부터가 그렇다. 대통령은 단임이고,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기는 6년이다. 대법원장은 연임할 수 없고 대법관은 연임할 수 있지만 연임한 적이 없다. 심지어 정년까지 있어 대법관은 65세, 대법원장은 70세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대법관 임기가 6년 밖에 안 되고 정년까지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물론 일본, 독일, 스페인 등 많은 나라의 대법관은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다. 그게 맞다.
대통령이 단임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는지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3년차만 되어도 레임덕이어서 공무원들이 말을 안 듣는단다. 내 생각엔 어차피 연임이 안되니 국민을 겁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공무원들은 단임 대통령제 아래에서는 급한 불만 끄는 시늉을 하면서 시간을 넘긴다. 일하는 척 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된다. 처음에 약속한대로 정책의 효과가 났는지 알아보기 전에 장관이 바뀌고 정권이 바뀐다. 장으로 부임해서 하는 일 중에서 부하 관료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인사 숨통을 열어주고 부서를 바꾸어 주는 것이다.
이게 정당으로 가면 더 짧아진다. 당 대표는 2년이지만 그것도 수시로 바뀐다.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는 1년이다. 사실 나는 이것이 제일 신기하다. 세상 어디를 가면 정당 대표 임기가 2년이고 의회 원내대표를 1년만 하는 의회가 있는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비례대표를 하면 당연히 한번에 그쳐야 하고 지역구로 나가야 한다. 원래 갖고 있던 지식에 비례대표로서의 경험을 더해 본격적으로 공무원 감시를 제대로 할 만 하면 나가야 한다. 자기들 끼리는 꽃보직으로 치는 자리이니 그것을 한 사람에게 계속 하라고 놔둘 리가 없다. 
지역구라고 해도 만만하지가 않다. 3선 쯤 하면 험지로 나가라고 후배들이 종주먹질을 한다. 자기들도 의원이 되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달라는 것이다. 선거구민의 의견은 알 바가 아니다. 
민간부문으로 가보자. 공기업체 사장은 물론 재벌 회사 사장 중에서 지배주주 본인이거나 친인척이 아니면 3년을 채우고 나서 연임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이 연임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특별히 잘하지 않은 이상 바꾼다가 대세다. 
그중에서도 관치가 제일 드센 금융산업을 보자. 은행장 중 연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부가 주주도 아닌 곳에서 연임 하려고 해도 관의 눈치를 본다. 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다. 요새는 아무나 시킨다. 우리금융의 경우 금융업을 전혀 모르는 관료를 지주회사 회장을 시켰다. 회의 석상에서 금융산업 기초 용어를 못 알아들어서 참석자들이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고 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자 일년만에 내보냈다. 온갖 자리의 하마평에 오르내려서 사람들이 지겨워서 어디 자리 하나 빨리 마련해주어야겠다고 푸념을 하던 대통령 대학 동창을 시켰다.
그런 곳에서는 연임하는 법이 없다. 잘나서 시킨 것이 아니라 힘 센 사람 덕에 되었는데 오래 있겠다는 것은 신사협정 위반으로 생각한다. 그가 과거에 어떤 성과를 냈기에 행장이나 회장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런 것을 물어보면 물색 없는 인간 취급을 당한다. 물러날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관심이 없다. 할 만큼 했으니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들 지금 사람은 누구 덕에 되었는지, 다음에는 누가 누구 덕에 될지에만 관심이 있다. 
재벌 금융 회사도 마찬가지다. 전혀 그 분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몇년 전 삼성생명 사장으로 그룹 감사팀장 출신인 사람을 임명한 적이 있다. 생명보험은 커녕 금융회사에 다닌 적도 없는 사람을 시켜서 사람들이 혀를 찼다. 금융당국 마저 불쾌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삼성은 그런 일을 자주 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 쳐놓고 오래 다니는 사람은 없다. 교보생명은 어떤가? 45세 중년이 되도록 산부인과 의사만 하던 아들이 와서 경영을 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20년차에 달하니 나름 익숙해졌을 것이지만 처음 10년은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전문성이 없는 내부 인사를 사장으로 시키는 것 보다 더 자주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잦은 사장 교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자주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지난 10년간 내가 다섯번째 사장이라고 했다. 안다, 그 마음. 나라도 심드렁하겠다. 
그래서 처음 고용계약을 할 때 다른 것은 다 좋다, 보상 조건도 알아서 해라, 단 임기 보장은 확실하게 하라고 했다. 회사를 살리려면 그것 없이는 그 누가 와도 안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그것을 못 참았다. 나는 당연히 거부했고, 그것이 도리어 화제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이토록 비뚤어진 사회인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사장이 3년마다 꼬박꼬박 바뀌는 회사, 그 사장이 이사회의 독립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와 주주총회의 의결을 통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정해지는 회사가 제대로 굴러 갈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람이 혁신을 하고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사장이 3년 후에는 물러난다는 것을 모든 조직원이 예상하는데 그들이 왜 지도자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가겠는가? 사장이 갈릴 때마다 회사방침이 바뀌고 전임 사장과 가까웠던 사람들이나 그가 영입한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는데 직원들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이유가 있을까?
이것은 인간사에서 너무도 기초적인 것이라서 굳이 말하는 것이 구차할 정도다. 그런데 한국 금융산업에서는 이런 일이 도리어 일반적이다. 
한국 금융산업에서 혁신이 일어나지 않고, 변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러나 잠깐만 하고 그만 둘 지도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혁신과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임직원들도 그 사정을 그동안 경험으로 빤히 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을 하지 않을 뿐 같은 생각을 한다. 일단 상황이 이렇게 주어지고 나면 결과가 뻔하다.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내가 찾아낸 유일한 탈출구는 그런 것에 눈을 감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이 회사에 다니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변화를 추구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는 수 밖에 없다. 마치 우리 모두가 결국은 죽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사랑하고 고뇌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음, 이거 너무 나갔다.) 
이게 한국 사회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예사로 발생한다. 하도 빈번하게 일어나서 이제는 얘기 거리도 안 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정부는 눈치도 안 본다. 기탄이 없다. 그냥 한다.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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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메리토크라시의 위기 (I)

어느 조직이나 사회가 되었든 좋은 의미의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가 안정적으로 조직을 이끌도록 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알다시피 영어로는 이것을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한다. 흔히들 선발만 강조하는데 그가 일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이 두 가지 모두 실패하고 있다. 신분 계층적인 벽이 다시 두꺼워지고 있으면서 그 벽 안에서는 내부자들끼리 서로 돌려 가며 해먹던 조선시대의 관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하다.
최근 한국 언론에 조금 엉뚱한 기사가 뜬 적이 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총장이 새로 선임되었는데 그가 흙수저 출신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명문이라도 어느 미국 대학 총장 선임이 기사화된 것이 왜 아시아 국가의 뉴스 거리가 되는가 의문스러웠다. 또 미국 대학 총장은 대부분 학문적으로 훌륭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리더쉽이 있거나 또는 모금 능력에서 뛰어난 사람이 맡는 직책이다. 여기서 그가 가난한 집안 출신인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의 유수 대학 총장 중에도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다. 
그러나 정작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다른데 있었다. 그가 12대 총장이라는 것이다. 1891년에 설립되었으니 거의 120년이 넘은 학교인데 이번 총장이 겨우 12번째다. 사실 나는 몇년전 다른 학교의 역사를 읽다가 같은 이유로 놀란 적이 있다. 과거 7대 여자대학 명문 중 하나였던 바사 대학(Vassar College)은 현 총장이 11대다. 1861년 창립이니 150 년 동안 겨우 전임 총장이 겨우 10명에 불과하다. 한 사람당 15년씩 재직했다.
대학만 이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현 GE 사장인 이멜트는 사장에 취임한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40대 초반에 사장이 되었고, 지금은 60대 초반이다. 그의 전임인 웰치는 1981년에 사장으로 취임한 후 20년 후인 2001년 은퇴했다. 즉 이 회사는 지난 40년 동안 사장이 단 두명이었다. 비록 단기 성과주의가 극성을 떨어서 상장사 사장의 평균 임기가 3~4년으로 줄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10년이 넘게 사장으로 있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이런 장기 복무는 사립 학교나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몇년 전에 본 미국 신문에 의하면 미 국방성에서 핵무기 전략을 담당하던 수석 전략가가 은퇴를 했을 때 그의 나이가 70대 였다. 그런데 내가 그 기사를 보고 정작 놀랐던 것은 그의 은퇴 나이가 아니라 그의 재직 기간이었다. 그는 그 보직을 맡은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다고 한다. 거의 40년은 한 자리에서 일했던 것이다. 
조금 장소와 격을 바꾸어보자. 현 독일 수상인 메르켈이 취임한 것은 2005년이다. 현재 11년째 수상으로 일하고 있다. 그 전에 콜 수상은 1982-1998년 즉 16년을 재임했다. 그 전임인 슈미트 수장은 1974년에서 1982년까지 8년을 했다. 50년대에서 60년대에 있던 아데나워를 기억하는가? 그의 밑에서 재무상을 거의 15년을 하면서 독일의 사회경제체제를 구축한 에르하르트르 기억하는가?
서론이 너무 길어져 버렸으니 이 얘기는 그만하고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공영방송의 침몰 원인을 지배구조 문제에서 찾는 컬럼을 보고 동감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공영방송 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고 했었다. 
최근 일어난 방석호씨와 관련된 추문이 잘 보여주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각 분야에서 윤리적이고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턱도 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리더로 임명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람들도 현 정권의 이런 무착스러운 인사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인사를 전횡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인사권의 독점이 꼭 형편 없는 인사로만 귀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사권자가 좋은 인물을 리더로 임명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경우도 많았다. 박정희와 박태준, 전두환과 김재익이 좋은 예다.
현 정부가 이런 사람들을 계속 리더로 선임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것은 인사권자의 무능을 나타내는 징표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만약에 회사 사장이 뽑은 사람들이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실패한다면 이는 뽑힌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뽑은 사람의 잘못이다.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는 그런 사장을 뽑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조직의 리더가 하는 일의 반은 인사다. 그리고 비전과 전략을 세우는 일이 나머지 반이다. 실제로 일을 해보면 전략보다 인사가 훨씬 어렵다. 논리가 안 통한다. 상대가 사람이고 그 사람은 자기만의 자유의지와 결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결과를 미리 예측하거나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어느 리더가 일을 잘하느냐는 사실 전략보다 인사를 잘하느냐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전략가가 꼭 좋은 리더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신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항상 좋은 리더로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인사를 계속 실패하는 것이 특정 인사권자가 아니라면? 그런 일이 일개 회사나 방송국이나 교회가 아니라 한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인사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대를 이어서 계속 인사를 실패하고 있다면? 지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좋은 리더를 선발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많다고 생각한다. 어느 분야나 좋은 사람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실제로 각 분야에서 좋은 리더라고 손꼽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내가 이 주장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가지 생각 실험을 해보자. 만약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자. 즉 그들 주장에 의하면 한국 사회가 그런대로 좋은 리더를 계속적으로 선발해 왔고 그들이 도처에서 지금 일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그런 좋은 리더가 3~4 년 만에 계속 바뀌는가? 그렇게 좋은 리더가 계속 바뀌는 것이 좋은가? 그런 조직이나 사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지금 한국이 그러하다. 엄청나게 많은 분야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3~4 년은 커녕 1~2 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그 후임자도 1~2 년 만에, 아니면 끽해야 3 년 만에 물러난다.
내 생각에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 뿌리가 오래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조 500여년 동안 지금의 서울 시장에 해당하는 직책은 한성 판윤이었다. 그 500년 동안 한성판윤 직책을 맡았던 사람의 수는 약 1500명이다. 일년에 세명 꼴이다. 이게 특정 시기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5백년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성판윤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관직에 해당되는 얘기다. 정승판서가 수시로 갈렸다. 조선시대 인물들의 관직 경력을 보면 수개월 만에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관직을 한번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 직함을 한 사람이 오래 독점하도록 두지 않았다. 세습 신분사회에서는 그런 관직을 한번 해보았다는 것이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번 하면 그 행세를 두고 두고 했다. 조부가 정 3품이었느니, 5대조 할아버지가 이조정랑이었다느니.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러한 현상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가 제한된 관직 자리를 양반들 사이에 나누어 주어야 하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이런 풍속과 기제는 현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장관이 일년을 못 가서 바뀐다. 사장이 3년이면 갈린다. 연임을 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장 아래로 내려와도 마찬가지다. 꽃보직은 순환근무로 나눠 먹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종신에 가까운 국회 원내 총무를 한국에서는 1년 동안만 한다. 국회의원 3선이면 험지에 출마하라고 한다. 모두들 '왜 너만 해먹느냐, 나도 좀 해보자'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광야를 헤맬 때 그들의 지도자는 모세와 여호수아 둘 뿐이었다. 5년 단임 임기제였으면 어땠을까?

사회에 만연한 지배구조 실패




한국일보 최진주 기자의 글이다
공영방송의 침몰 원인을 공영방송의 취약한 지배구조에서 찾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듯이 ‘... 경영진을 전문성이나 도덕성은 무시하고 정권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지배구조’가 한국에서 어디 공영방송 뿐이겠는가? 
내 생각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기업이 그렇고, 학교가 그렇고, 심지어 종교 단체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조직은 의사 결정을 해야 하고 그 의사 결정을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좋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리더가 필요하다. 어떻게 좋은 리더를 찾고 그가 동료들과 함께 좋은 결정을 오랫동안 잘 하도록 해 줄 것인가에 관한 규칙이 지배구조다.
각자가 생각해보자. 지금 자기가 속한 조직과 분야에서 좋은 사람이 리더로 뽑히고 있는가?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전문성이나 도덕성에서 훌륭한 사람이 리더로 뽑혀 일하고 있는가? 각자가 속한 분야가 좋은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고 믿는가? 만약 리더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왜 그들은 그렇게 자주 바뀌는 것일까? 
나는 한국이 좋은 리더 선발이라는 사회 기능에서 심각한 기능부전 현상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배구조의 실패를 겪고 있다. 리더를 뽑을 때 지금까지 사용하던 방식을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도 못하고, 새로운 방식을 익혀야 하는데 익히지도 못했다. 
무엇이 버려야 할 방식이고, 무엇이 익혀야 할 방식인가? 뻔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우리가 전제적 중앙집권 운영방식을 버려야 하고, 공화적 민주적 분권화된 운영체제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선거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공영방송국이든, 기업이든, 학교든, 종교단체든, 가족이든, 모든 공동체가 공화적 민주체제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에서 사장 혼자서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경영방식, 분권화에 의한 자율경영을 추구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였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이다. 영어로는 Republic of Korea다. 여기서 민국은 Republic을 번역한 것이다. 공화제에서는 공공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참여해서 같이 논의하고 의사 결정을 한다. 이에 비해 민주정(Democracy)은 엄밀히 말하면 다수결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것을 뜻할 뿐이다. 선거로 지도자를 뽑았어도 민주적인 공화국(Democratic Republic)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공화제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 공중(Public)은 있는 것일까? 우리 고향이니까 무조건 뽑는 사람들은 공중이 아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1987년에 얻은 것은 Democracy 였을 뿐, Republic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전제적 민주정을 갖고 있다. 분명 시민들의 투표로 뽑았는데 그 리더는 전제적이다. 전제적 리더가 모든 하위 조직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이를 위해 자기의 전제에 충실한 자들을 자질과 무관하게 지도자로 뽑고 있다. 그런 자들이 어디 아리랑 TV 방석호 하나 뿐이겠는가? (재벌기업에서 세습에 의해 자리에 오른 총수가 자기에게 충실한 사람 위주로 지도자를 뽑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
그리고 혹시 전제적 민주정에서는 정당의 적대적 공생관계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지금 여당과 야댱은 모두 당원의 토론과 참여를 거쳐 운영되는 민주적, 공화적 조직이 아니다.양측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부 운영은 전제적 민주정과 유사하다. 제 3당이라고 나선 사람들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 눈에는 지금 한국의 정당의 행태는 조선시대 당쟁을 연상시킨다. 
나는 한국 사회가 기능 부전에 빠진 근본적 원인이 바로 우리가 전제적 중앙집권과 관원대리 체제에 아직도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 정치의 중앙집권적 전제적 요소를 어떻게 불식할 것인지를 자기 당의 정강과 정책으로 내세우는 정당이 없다는 것은 나로서 미스테리다. 그들은 시민들이 그런 것 보다는 당장 빵을 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본의 장기 침체는 그저 경제 정책이나 조직 경영의 실패가 아니다. 그 나라 민주체제의 실패를 뜻한다. 우리 역시 지난 십년 동안 한국민주주의 실패를 겪고 있다. 일본에서 그러하듯이 우리의 민주주주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빵 부스러기는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빵을 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