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9일 화요일

경제민주화 논쟁의 의미: 한국 사회 최초의 경제체제 논쟁

기독 민주주의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 1세가 오늘 즉위한다. 벌써부터 파격적으로 소탈한 그의 행보와 가난한 자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론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와 청빈한 삶의 상징인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천주교 역사 상 처음으로 자기의 연호로 선택했다. 그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교황으로 선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옆에 있던 브라질 추기경이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카톨릭 교회가 가난한 자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단순히 감상적 측은지심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산업혁명 후 19세기에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카톨릭 교회는 빈곤의 문제와 이를 낳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러 교황들이 여러 차례 회칙(Encyclical)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경고해왔다. 첫 회칙은 1891년 레오 13세가 발표한 것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서도 빈곤에 대한 사회 비판 및 교회의 의무를 강조하는 회칙은 계속되었다.

유럽의 현대 정치 지형에서 우익을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 정당이 차지하고 있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 기독 민주주의 정당은 한국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들이 왜 기독교 민주당으로 불리는 지도 잘 모른다. 기독 민주주의는 보수주의와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는 카톨릭 사회교리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유럽에서 발생했다. 유럽의 기독민주당은 보수세력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폐해를 모두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한 움직임의 소산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소득 불평등의 문제에 국가가 개입해서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배척하고, 시장 경제를 선호한다.

기독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

흥미로운 것은 이 기독 민주주의가 경제민주화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본다.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부작용 제거를 위해서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에 근로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노동조합의 주장이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반영되면서 작업장 민주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이론적 틀을 갖춘 것은 1950년대 독일의 기독민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장하면서였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독일의 전후 경제부흥을 이끌어낸 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중시하고, 독과점을 철저히 규제하고, 노동자의 기업 의사결정 참가를 권장하고,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독일 기민당의 경제정책이었다. 대공황 이후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계획경제와 케인즈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다시 들고 나왔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유럽식 신자유주의는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에 대해 엄격하고, 보편적 사회안전망 제공을 적극 수용한다는 면에서 1980년대 이후 영미권의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이러한 수정자본주의 경제체제 구축은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대륙 국가에서도 이루어졌다. 유럽국가들은 1950년대 이후 열악한 근로조건, 독과점체제에 따른 경제력 집중, 빈부 격차의 심화 등 자본주의가 노출한 비민주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사회경제적 소외계층들의 꾸준한 요구를 반영하여 경제재건을 이룩했다.

현재의 유럽 경제 체제는 우파 정당과 좌파 정당 사이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경쟁 과정을 통해 체제 노선의 수렴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독일 사민당은 2차대전 후에도 한동안 주요 생산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다가 1957년 선거에서 대패하면서 비로소 국유화 정강을 포기했다. 프랑스 역시 사회당이 1982년 집권하면서 주요 산업 국유화를 실시했지만 그 후 사회당은 국유화를 포기했다.

이와 같이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등장한 전후 유럽의 수정 자본주의체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체제 수립은 좌우 정당간 토론과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파시즘과 한국 경제체제

한국에서의 경제민주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박정희 시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고속 성장기에는 덮어두었지만 성장속도가 느려지면 드러난 사회경제적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로 경제민주화라는 말로 집약된 것이다. 기업 지배체제 개혁, 독과점 방지, 노동시장 개혁도 있지만, 복지체제 또는 조세체제를 통한 경제력 집중 방지 등이 우선 과제로 등장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독일에서와 같은 기업 경영권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은 한국인들이 해방 후 최초로, 정치적인 압제의 굴레 밖에서 자유롭게, 정치과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한 체제 논쟁이다.

해방 후 한반도 가운데에 냉전 대립의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우리 민족은 우리가 원하는 국가체제를 자주적으로 결정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 역시 타율적인 체제였다.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채택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남한을 지배한 것은 국가사회주의 또는 파시즘에 가까웠다. 파시즘과 같이 민주주의도 뒷전이었고, 시장경제도 불신했고, 단지 이윤을 남기는 방식만 자본주의였다. 어떤 식의 민주주의와 어떤 식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독재정권 체제 아래에서는 금기시 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는 여전히 정경유착과 고속성장의 틀에 갇혀 있었다. 기존의 정부 주도 아래 대기업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에 자율화 바람이 들어오면서 재벌의 과잉투자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 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고속성장을 갈망했고 정경유착을 해결하지 못했다. 외환위기 덕분에 가까스로 정권을 잡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역시 이 체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의 주류 사회는 소득 양극화를 성장률을 높이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우파 정권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더 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각을 우파 정당이 하게 되면서 그들 역시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정치민주화 25년 후 시작한 경제체제 논쟁 

한국에서 경제민주화 논쟁이 본격화된 것이 바로 우파 정당의 자각과 돌파구 모색 후에서야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양당이 공동으로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정책 경쟁을 할 때 비로소 경제민주화 논쟁이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경제민주화가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 무의미하다.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도 갖추지 않은 채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로만 기능을 해서는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경유착과 고속성장 신화에서 벗어나 소득 양극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둘러 싼 논의가 바로 경제민주화 논의다. 결국 이는 우리가 어떤 경제체제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경제체제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와 경쟁을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1987년 민주화 혁명은 우리 사회의 정치 분야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대화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시작된 된 계기였다. 그 후 25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직접선거 민주주의에 주 관심이 가 있었지만,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 인권 존중,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자본주의,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황새, 흑두루미, 알락해오라기

지난번 가창오리 얘기를 읽고 사진이 없어 아쉬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진을 몇개 더 얻어왔다. 

황새


흑두루미


갈대 숲에서 목을 하늘로 올리고 앉아 있는 알락해오라기



 자세히 보면 눈이 보인다.


반복되는 신임 대통령의 인사 실패: 관료제 시스템 개혁의 또 다른 이유

박근혜 정부 인사

청문회 절차가 남은 인사들이 있지만 드디어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인사를 잘못했다는 비판이 벌써부터 돌고 있다. 야당에서 그런 소리하는 것이야 그러련 하고 넘어가면 된다. 그러나 현 정부에 비교적 호의적인 사람들도 인사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많다. 청와대도 그렇지만 해당 부처 장관을 하기에는 리더쉽도, 식견도, 경험도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인사에 성공한 대통령은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 취임과 같이 시작한 내각 인사들은 대부분 1년 정도 지나고 나면 교체되었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일을 잘 했다는 평가를 들었던 사람들도 별로 없다. 특히 정권 초기 장관일수록 그렇다.

어렵기만 한 인사

회사 다니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회사 경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사라는 것이다. 마땅한 사람은 드물고, 시키고 싶은 사람은 고사하고, 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몰려든다. 다른 일은 경험에 의지해서 일을 하면 자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데 고위직 인사는 처음 예상을 벗어날 때가 많다. 많은 경우 조직 임원 인사는 최선도 아니고 차선도 아니어서, 그냥 있는 자원으로 돌려막기에 그칠 때가 많다.

임명 후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기 뜻대로 하려고 들기 마련이다. 또 인간이기에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성격도 있어서 자기 행동이 자기 뜻대로 안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임명할 때 가졌던 기대에 못미치는 게 다반사다. 특히 조직 상층부로 갈수록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기 때문에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까지 맡은 일을 잘해서 승진을 시켰는데 새 직무에서는 실망스러운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외부 인사는 물론이고,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을 거친 내부 승진의 결과인데도 그렇다.

이렇게 인사가 어려운데도, 한국에서는 사장이 되기 전에 인사를 해보고 사장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장은 전략, 생산, 영업, 재무 출신이고 인사 출신이 사장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원 기간 중 인사를 맡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사장이 된 후 인사 경험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는다.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끙끙 앓는다. (나는 그래서 사장감으로 키울 인재는 임원 시절에 인사 업무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한국적 조직 운영 방식 탓도 크다. 아마도 군대 조직 운영 방식에서 유래한 것일텐데, 인사 관련 권한을 사장과 인사팀이 틀어쥐고 중간 임원에게 재량권을 별로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발령이 나서 가보면 이미 같이 일할 아래 임원이 다 짜여져 있다. 임원 평가도 사장이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어서 직접 상위자가 한 평가를 무시할 때도 많다. 그래서 사장이 된 후에서야 인사권을 처음으로 갖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개별 인사는 물론이고 인사제도에 관해서는 더욱 문외한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한국 기업이 시정해나가야 할 숙제다.

신임 대통령의 행정부 인사

하물며 작은 기업 조직도 그러한데 수십만명을 지휘하는 행정부는 어떨까? 나는 항상 한국에서 신임 대통령이 행정부 조직을 짜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정부 운영 경험이 없는 대통령이 어떻게 정부 조직 인사를 잘할 수가 있을까? 회사로 치면 회사 운영 경험이 없는 사람이 사장으로 와서 사업본부장 인사를 하는 것에 해당한다. 당연히 잘 할 수가 없다.

지금과 같이 외부 인사인 신임 대통령이 조직의 수장으로 처음 와서 외부 인사로 정부를 채우는 것은 일반적인 조직 운영 경험 상 위험하다. 외부인사 출신 장관은 업무와 조직 파악하는데 적어도 1년은 걸린다. 국회 나가서 혼나고 여기저기 행사장 돌아다니느라 차분히 일을 볼 시간도 없다. 그렇다고 업무 경험이 있는 관료 출신으로만 인사를 할 수도 없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라도 행정부의 과장, 국장급의 중간 관리층에 자기가 원하는 인사를 임명할 수 없다. 따라서 관료 이외에는 행정부 경험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식의 정부조직 운영방식 아래에서는 그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인사에서 성공하기란 극히 어렵다. 정권 초기에 외부 인사를 장관으로 쓰고 난 후 실망하게 되면서 정권 후기에 가면서 점점 관료 출신으로 내각이 짜여지는 것은 어찌보면 필연이다.

관료제 시스템 개혁

차라리 정권 초기에는 전현직 장차관 출신 관료를 장관으로 쓰고, 차관과 차관보 자리에 외부 인사를 영입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서 그들을 장차관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어떨지? 근본적인 개혁은 과장과 국장 자리 중 일부를 외부인사로 채울 수 있게 하는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이들은 다시 학교나 기업 등 민간부문으로 나가거나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을 하고, 정권이 바뀌면 다시 정부에 복귀해서 고위 행정직을 맡으면 어떨지? 공무원법을 고쳐야 할 수 있는 일이고, 뿌리깊은 고시 관료들의 기득권과 부딪칠 일이므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신임 대통령이 당선 후 짧은 시간 안에 청와대만이 아니라 장관직까지 외부 인사를 쓰는 것은 일반적인 조직 운영의 원리 상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시스템을 개선하지 못하는 한 지난 정권이 겪었던 문제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싶다.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가창오리 때문에 새 됐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가창오리 떼. 멀리 서해대교가 보인다.


황새가 왔다고 해서 서산만에 갔다. 황새는 더 이상 한국에 텃새로 머물어 살지 않고 철 따라 이동할 때만 들른다고 한다. 미꾸라지 등을 먹고 살기 때문에 서산만 그 넓은 평야에서 아직 논바닥에 물이 남아 있는 곳에 가야 볼 수 있다. 황새는 날개 끝이 까맣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대략 여섯 마리를 본 것 같은데, 다른 새들보다 더 예민해서 사람이 근처에 가면 날라가 버린다. 천천히 젓는 그 날갯짓이 두루미보다 더 여유롭고 우아하다. 가만히 보니 항상 처음에는 앞 방향으로 날아오르다가 곧 방향을 틀어 휘 옆으로 날면서 고도를 높인다. 무언가 공기 부력을 이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황새가 몇 마리 안되는 것에 비해 흑두루미들은 여기 저기 떼로 나뉘어 있다. 몸은 까맣지만, 목부위는 하얗고, 머리 꼭대기에 붉은 색 반점이 있어서 색 조화가 절묘하다. 간혹 목 부위가 옅은 회색에 가까운 놈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어린 새들이라고. 우리가 본 흑두루미들은 순천에서 겨울을 나고 북상 중이란다. 일본 이즈미에 있는 흑두루미 떼는 아직 이동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아냐고? 이동을 시작하면 그곳 사람들이 연락을 해준단다.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먹이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와도 그냥 두는데 이 흑두루미들은 사람에 예민하다.

억새 풀밭 사이에 자리를 틀고 있는 알락해오라기를 발견한 것은 망외의 소득. 나를 데려가 준 야생조류 전문가가 차를 몰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알아봤는지 그 대단한 실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제방 길 아래 약 20미터 가량 떨어져서 누워있는 갈대밭 안에 있었지만 그가 알려주는데도 막상 새를 알아보는 데 한참 걸렸다.

망원경으로 본 모습은 화려하다고 할 만큼 아름답다. 알락달락한 무늬 때문에 붙인 알락해오라기라는 이름처럼, 누런 바탕에 고동색 줄 무늬가 화려한데 마치 불로 살짝 그슬린 오동나무 무늬목 같다. 재미있는 것은 풀밭에 앉아 뾰족한 부리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있다는 점. 가만히 있으면 영낙없는 억새풀이다. 바로 코앞에서 우리가 자기를 보고 있어도 그대로 가만히 땅바닥에 붙어 있었다. 자기 엄폐 능력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진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던 우리가 지친다. 조약돌을 근처에 던져봐도 능청맞게 모르는 척하니 픽하고 웃음이 난다. 결국 우리가 졌다. 고얀 놈.

오는 길에 가창오리를 보려고 삽교호수에 갔다. 해가 질 무렵에 하늘로 날아올라 펼치는 군무를 기대하고 찾아갔다. 가창오리는 거의 모든 개체가 한국에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군집성이 유난히 강하고, 낮에는 물에 떠 있다가 밤에 되면 곡식 낱알을 먹으려고 논으로 올라온다. 서산만 먹거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요새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단다.

삽교천 방둑을 따라 차를 천천히 몰면서 망원경으로 찾다가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 가까이에 붙어 모여있는 오리떼를 발견했다. 하도 많은 오리들이 촘촘히 물위에 모여있어서 처음에는 섬의 끝자락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눈으로 보면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망원경으로 지켜보니 다른 오리들이 섬 뒷편에서 계속 날아와 합류하고 있었다. 야생조류 탐사가들이 공유하는 정보에 의하면, 그제 저녁에는 7시 5분 쯤 하늘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그 시간까지 차에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날씨가 좋아 각도가 낮은 햇살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어 석양의 햇빛에 반사되는 최고의 군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침이 꼴깍.

석양이 먼산 기슭에 걸치기 시작하는 6시 반이 넘어가자 오리들의 움직임이 슬슬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멀리서 눈으로 보면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망원경으로 보면 상류쪽 끝자락에 있는 오리들이 계속 하류 쪽으로 낮게 날아 옮겨가고 있다. 마치 전체 떼가 모여 이룬 섬이 하류 쪽으로 천천히 떠가는 것처럼 보인다.

6시 55분 경, 붉은 석양이  먼 산 등성이 아래로 완전히 내려가 주위가 거뭇한 땅그림자에 휩싸이자 오리떼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진다. 갑자기 전체 무리 중 삼분의 일 정도에 해당하는 놈들이 낮게 날아오르기 시작하더니 한바퀴를 돌아 다시 내려 앉는다. 이러기를 몇 차례 하면서 오리떼 섬은 어느덧 빠른 속도로 하류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차를 돌려 따라가는데 갑자기 검은 먼지 구름이 하늘로 올라간다. 이 구름의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면서 나비 모양 처럼 옆으로 퍼지더니 금방 다시 둥그런 뭉치로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군무가 시작되었다.

어! 그런데 구름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간다. 너무 빨라서 차로 따라갈 수가 없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어느새  서해대교 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너무 멀어서 날아간 방향 하늘에 거무스레한 자국만 가웃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30초 정도 만에 벌어졌다. 이런 허망한 노릇이!

원래부터 가창오리의 군무는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어떤 때는 한 자리에서 30분에 걸쳐 군무를 펼치기도 하지만 다른 날에는 그냥 훌쩍 저녁 먹으러 날아가 버리기도 한단다. 나를 데려간 분도 여러 번 봤지만 제대로 만족스럽게 군무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개체 수는 많았지만 군무가 너무 짧다. 그것도 너무 빨리 멀어져가면서 벌어졌다. 입맛만 다실 뿐. 이놈들! 다시 만나면 잡아 먹어 버릴까 보다.

자연 현상은 이렇게 변화무쌍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 기대를 훌쩍 벗어나기도 하고, 기대 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기도 한다. 그게 어쩌다 한번씩 자연을 느끼려고 여행을 다니는 재미 중 하나다. 변화막측.

사람들로 들끓는 도시를 벗어나 자연의 일부를 접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아, 그렇지. 이 지구에는 사람과 시멘트와 차만 있는 게 아니었지! 이 지구는 인간 말고 다른 생물도 사는 곳이었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한국의 투자은행업, 어떻게 키워야 하나

로스차일드 서평

오늘 중앙일보에 쓴 서평 (가족경영, 로스차일드가엔 양날의 칼이었다)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에 대해 니얼 퍼거슨이 쓴 책에 관한 것이었다.

영어 원문만 해도 1,300 쪽이 넘고, 번역으로는 1,500 쪽이  넘어 두권으로 나뉘어 나온 이책은 금융사에서는 기념비적인 저작이지만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쉽지 않다.

로스차일드는 경제사나 금융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름이다. 제일 오래된 투자은행이어서 업계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름을 안다. 일반인들 중에는 유태인 금융가에 대한 음모론적인 시각에 의한 책들 때문에 이들 이름을 알게된 사람들도 꽤 된다. 

그러나 그 이름을 전혀 못들어본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로스차일드가문의 내력을 설명하다 보면 신문사에서 허용한 짦은 지면이 다 찬다. 서평 쓰는 재미가 없다.

그래서 시각을 조금 비틀었다. 투자은행업의 본질에 대한 시각에서 글을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정부의 금융정책 목표 중 하나는 대형투자은행 육성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한국의 증권사와 서구의 투자은행을 규모를 비교하면서 대형 투자은행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0년에 걸친 서구 투자은행업의 역사를 무시하고, 투자은행업의 핵심경쟁력을 도외시한 주장에 불과하다.
자본시장법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 재경부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을 들고 나왔다. 그 당시 정부는 대단한 것이나 하는 것처럼 선전을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별게 없어서 증권업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가 대형 투자은행 육성이 필요하다고 하는 논리는 간단했다. 한국은 앞으로 기업가 정신에 의한 창의적 기업활동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돈을 대줄 자본시장이 필요하다. 자본시장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자본시장 금융중개를 맡은 투자은행이 커져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증권사는 서구의 투자은행보다 자본금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다. 그러니 증권사 대형화가 필요하다. 이게 정부의 논리였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물론 그 당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규제법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집안 정리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또, 정부의 규제를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나열하는 방식(Positive 방식)에서 안되는 것을 명시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능하게 하는 방식(Negative 방식)으로 바꾼다고 했지만 정부의 구태의연한 업무 방식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별로 믿을 수가 없었다. 투자자 보호를 강화한다고도 했지만 기존 법 안에서도 제대로 하지 않는 규제당국이 법을 새로 바꾼다고 행동을 바꿀 것 같지도 않았다.

과잉 자본금

게다가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의 대형 증권사들은 이미 쌓아놓은 자기 자본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증권업계 전체의 자기자본수익률(ROE: Return on Equity)는 평균 약 4%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직원을 고용할 필요 없이 은행에 정기예금을 들어도 그보다는 더 벌었을 것이다. 이렇게 쌓아 놓은 자본도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증권사의 자본을 더 늘려서 무엇을 할 것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2011년에 다시 한번 더 자본시장통합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자본을 늘려봤자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는 업계의 불평을 의식해서 대형증권사에게만 특정 업무를 허가하겠다고 했다. 헷지펀드를 허용하고 그 헷지펀드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자본금이 3조원을 넘기는 증권사에게만 허용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네가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겠다는 원칙에도 어긋난다. 헷지펀드를 대상으로 영업을 할 것인지는 기업 자율에 맡겨야 하는데 이것을 자본액수 기준으로 선을 긋겠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장사에서 대단히 돈을 벌 것이라는 자신을 하기도 어렵다.

정말 희극은 일부 대형사들이 법 통과를 믿고 자본을 먼저 증자한 것이다. 2011년 하반기 증자를 통해 자기자본 3조원을 넘긴 곳은 대우증권, 삼성증권, 우리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현대증권 등 5곳이다. 이들이 당시 증자한 규모는 3조 4,000억원에 달한다. 증권업 전체 기존 자본금 대비 약 13%를 증자한 셈이었다. 대우증권은 1조 1,200억원을 증자했고, 우리투자증권은 6,300억원을, 현대증권은 5,600억원을, 한국투자증권은 7,300억원, 삼성증권은 약 4,000억원을 증자했다. 법 통과를 보고 난 후 증자를 해도 되었을텐데, 정부가 눈치를 주어서인지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증자를 한 것이다.

그 후 1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그 법은 통과가 되지 않았다. 정권 이양과 함께 사임을 한 김석동 위원장이 퇴임 전 열심히 법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실패했다.

규모 보다 투자자 보호와 인재 경영

그러나 법이 통과되었든 아니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투자은행업의 핵심은 규모에 있는 게 아니다. 고객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윤리적 기업 문화를 통한 평판 관리, 전문인력 양성, 적절한 보상체계 설계 등에 있다. 지금처럼 지배주주가 따로 있고, 직원을 언제라도 갈아댈 수 있는 머슴 다루듯이 해서는 제대로 된 투자은행을 키울 수가 없다.

정부가 선심 쓰듯이 육성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지금처럼 인위적인 자본 규모 규제로 선을 그으려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프랑스 정부가 1982년 로스차일드 은행을 국유화하고 나서 몇년이 지난 후 프랑스 로스차일드가는 다시금 자기 이름으로 회사를 차렸다. 그때 자본금이 겨우 1백만프랑이었다. 평판과 머리만 그대로면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증거다.

투자자 보호가 제대로 안되는 나라에서 투자은행과 자본시장은 발달할 수가 없다. 자본시장은 참가자들의 신뢰를 먹고 큰다. 정부가 자본시장을 육성하고 싶다면 투자자 보호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배주주의 전횡과 일감 몰아주기, 빼돌리기부터 막아야 한다. 소액주주 권한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주어야 한다. 기업 회계의 신뢰성을 올려야 한다. 이런 일을 하지 않은채 억지로 회사 자본금이나 키운다고 될 일이 아니다.